SOULMATE-91216
- 주예린 지음
학원가 앞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삼각김밥을 먹고 있는 남자애를 보았다. 그 애와의 첫 만남이었다.
나는 시위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. 밤 늦게까지 이어진 시위 행진을 마치고 버스가 끊겨 세 시간 가량 걸어서 학교 앞 고시원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. 그 아이는 시위가 이어지던 몇 주간 내가 지나칠 때마다 같은 학원가 앞 계단에서 교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면서 삼각김밥을 먹고 있었다.
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말을 걸어 왔다.
- 넌 자퇴했나 봐?
- 웬 자퇴?
- 머리가 노랗잖아.
- 난 대학생이야. 왜 멋대로 반말이지? 교복 보니 중학생 아니면 고등학생 같은데.
- 어디 가는 길이야?
- 네가 무슨 상관? 그리고 왜 계속 반말이지?
- 난 원래 이래.
무시하고 지나쳐 가려 했다. 그 아이가 내 손목을 잡았다.
- 집까지 바래다 줄게.
- 나 혼자 갈 수 있어.
홍제천을 같이 걸었다. 컴컴한 밤 가로등 불빛이 강물에 비쳐 반짝이고 있었다.
- 주말 아침에 만나자.
- 내가 왜?
- 그냥, 심심해서.
- 난 심심하지 않은데?
- 그냥.
다음 주말 아침, 그 아이가 고시원 건물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.
- 내가 언제 나올 줄 알고 기다렸어?
- 그냥, 뭐라도 하러 나오겠지 싶어서.
- 내가 안 나오면 어쩌려고?
- 그 카메라는 뭐야?
- 주말에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는 걸 좋아해.
나는 홍대 골목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어떤 여자애를 본 적이 있었다. 노란 머리에 펑크 옷을 입고 하염없이 걸어다니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떤 여자아이를.
자퇴한 중학생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다. 대학교 강의를 들으러 대학 건물로 들어가는 걸 봤었기 때문이다. 학교 안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그 여자아이를 본 적이 있었다.
밤에 집으로 돌아가 뉴스 특보를 보다가 대통령 퇴진 시위에 참가한 그 여자아이가 클로즈업돼 나오는 걸 보았었다. 사흘 연속 거리 행진 시위에 참가하고 있었다.
내가 다니는 학원도 아닌데 그 여자아이의 귀갓길 동선에 있는 학원가 앞에 앉아 있었다. 어차피 내가 전교 1등이라 학원은 빠져도 상관이 없었다. 엄마가 아침에 대충 던져준 냉동 삼각김밥이 자연 해동이 돼 눅눅해진 걸 먹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. 나 정도 키 크고 멋있는 애가 쳐다보고 있으면 말을 걸어줄 줄 알았었는데 말을 걸어주지 않아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.
- 넌 자퇴했나 봐?
그게 그 여자아이와의 첫 대화였다.
분홍색 들꽃을 예쁘게 뷰파인더에 담고 있는 귀여운 여자아이. 나보다 여덟 살이 많은 줄 알고는 있지만. 뽀얗고 통통한 그 아이를 난 마시마로라고 부르기로 했다.
- 마시마로, 나도 좀 찍어 주라.
마시마로의 취향에 맞춰 나도 펑크 고딕 의상을 입고 갔었다. 카메라를 잡고 날 멋있게 찍어 주기 위해 무릎을 꿇고 사진을 찍는 마시마로를 꼭 안아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.
- 사진이 너무 잘 나왔네. 내가 이렇게 잘생겼나?
- 응, 너 정도면 아주 잘생겼어.
- 날 좋아해?
- 아니? 난 원래 이런 말을 잘해.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잘생겼잖아. 누구나 아는 사실일 텐데?
난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. 단 한 번도. 난 이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.
강가를 거닐다 담배를 꼬나물었다.
- 흡연구역도 아닌데 담배를 막 피우면 안 돼. 휴대용 재떨이는 있니?
- 그런 거 없는데.
- 미성년자가 아무 데서나 담배 피우다 걸리면 어떡해. 우리 학교에 가서 피우자.
마시마로와 함께 마시마로가 재학 중인 대학교까지 걸어다가 아버지 친구인 대학 교수와 마주쳤다.
- 너 여기서 뭐 하니?
- 그냥 친구랑 산책 중이에요.
- 교수님 안녕하세요?
- 웬 친구?
- 마음 맞으면 친구죠. 박지원이 그랬다죠? 다섯 살 연상연하 정도는 친구라 생각해서 말을 놓고 친구를 하다 보니 그 친구들의 다섯 살 연상연하와도 친구가 되었다고.
대학 교수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아무 말 없이 지나쳐 갔다.
- 대학교란 참 좋네. 담배도 막 피울 수 있고. 자판기도 많고, 벤치도 있고.
- 너 근데 몇 살이니?
- 고 3이야.
- 그렇구나. 그런데 수험생이 주말에 이렇게 공부도 안 하고 돌아다니면 집에서 뭐라고 안 하시니?
- 어차피 전교 1등이라서 아무도 터치 안 해.
- 그렇구나.
- 넌 근데 주말에 보통 뭐 하니?
- 책 읽거나 과제하거나 전시를 보러 가거나 사진 찍으러 돌아다니거나 하루 종일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등등등.
- 이 학교에 올까 생각 중이야. 너랑 같이 학교 다니게.
- 난 4학년이라 내년엔 학교에 안 다니는데.
- 졸업하고는 뭐 할 생각이야?
- 취직해야지. 이력서를 여러 군데 넣고 있는데 다 떨어져서 그냥 내려갈까 생각 중이야.
- 부산 사투리야?
- 아니, 태어난 데만 부산이고 집은 마산이야.
- 마산 내려가면 뭐 할 거야?
- 뭐라도 하겠지. 서울에 있으려면 무조건 취직부터 해야 하잖아. 방세도 내야 하고 뭐 그러니까.
- 나한테 취직해.
- 무슨 소리야?
- 내가 먹여 살려 줄게.
- 미안하지만, 날 언제 봤다고?
- 그냥 쭉. 밴드 동아리를 했었지? 텔레비전에 나왔었지? 그걸 다 봤었어.
마시마로가 말 없이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.
- 그냥 그때부터 지켜봤었어. 내년이면 나도 어른이잖아.
다음날 학교를 때려치우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까지 마친 다음 대학교 입학까지 확정지어 놓고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. 한 달에 400만 원을 벌었다.
통장을 들고서 마시마로를 찾아갔다. 마시마로는 아직 취업 준비 중이었다. 전국적 취업난이었다.
- 이것 봐. 내가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했지? 그러니까 그냥 아무 말 없이 나한테 시집 오면 돼.
- 난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데. 그리고 웬 시집? 미안하지만 난 널 사랑하지 않아.
- 사랑하게 될 거야.
- 네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웬 사랑?
- 그럼 일단, 남자친구부터 시작하자.
- 난 아직 연애도 못 해 봤어. 그리고 난 누굴 만날 자격이 없어. 아무것도 못 된 데다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.
- 나랑 첫 연애를 하면 돼. 그리고 내가 먹여 살린다고 했지? 제발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나랑 같이 살아.
- 끝 -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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